[언론보도] 신기술의 ‘집객’과 ‘접객’
윤태성 교수님의 글이 매일경제 오피니언으로 보도되었습니다.
바둑기사 이세돌과 인공지능 알파고가 대국을 벌인 2016년 이래 인공지능은 시대의 총아가 됐다. 대학에서는 관련 과목이 여럿 개설되고 수업은 많은 수강생으로 넘쳐난다. 기업에서는 생존을 위해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해야 한다는 위기감이 팽배해졌다. 초등학생도 인공지능을 말하고 촌부도 인공지능을 알고 있다.
현시점에서 인공지능과 블록체인 기술은 4차 산업혁명을 실현할 가장 중요한 요소 기술이다. 거의 매일 전국 어딘가에서는 세미나가 열린다. 참으로 경이로운 현상이다. 아무리 중요한 기술이라도 전 국민이 이 정도까지 당사자 의식을 가진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다. 4차 산업혁명은 많은 사람을 모으는 `집객(集客)`에 성공했다.
기술은 좋은데 이 좋은 기술을 아무도 몰라준다면서 답답해하는 장면은 연구소의 일상 풍경이다. 파괴적 혁신을 실현할 만한 기술일수록 미래에 가서야 상식이 된다. 지금 당장은 별 쓸모가 없다. 미래의 상식을 현재의 지식으로 판단하면 가치를 이해하기 어렵다. 기술을 개발하고 보급하려면 먼저 기술을 널리 알리고 관심 있는 사람을 불러모아야 한다. 연구개발에서 가장 어려운 분야가 바로 집객이다. 기술 혁신에 성공하더라도 아무도 가치를 몰라주면 연구개발을 계속하기 어렵다. 연구개발 성과를 언론에 소개하고 자료를 공개하는 이유는 집객을 위해서다.
하지만 집객은 절반에 불과하다. 집객 후에는 `접객(接客)`이 필요하다. 접객은 불러모은 사람을 대접하는 행동이다. 기업은 기술을 이용한 제품과 서비스를 통해 수익을 올린다. 고객은 제품과 서비스를 실제로 사용해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 집객과 접객이 원활하게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집객이 제공자의 논리라면, 접객은 이용자의 논리다.
기술이 집객과 접객에 모두 성공한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처럼 집객에 성공하더라도 접객에 실패하기 쉽다. 4차 산업혁명이 집객에 성공한 지금, 이제부터는 접객에 집중해야 한다. 인공지능이든 블록체인이든 기술이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집객과 접객의 조화를 이뤄야 한다. 집객은 기술의 힘만으로 이룰 수 있지만 접객은 고객의 적극적인 참여가 없으면 이룰 수 없다. 접객의 출발점은 고객을 이해하는 작업이다. 고객이 정말 관심을 가지는 건 기술이 아니라 그 기술을 이용한 서비스다. 기술과 서비스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함께해야만 제대로 된 접객이 가능하다.
기술과 서비스는 술과 눈물에 비유할 수 있다. 시인 김현승이 노래한 것처럼 술잔의 절반은 눈물이다. 기술은 술에 집중하지만 서비스는 눈물에 집중한다. 하지만 이 눈물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눈물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술은 그저 화학물질에 불과하다. 아무 맛도 내지 못한다. 다시는 이 술을 마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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