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이홍규 교수님 시평] 지금은 찬사를 사양할 때

[중앙시평] 지금은 찬사를 사양할 때

한국 경제에 대한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그렇고, 세계 언론도 그렇다. 아마 우리 역사에서 이만큼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때도 없었을 것 같다. 그러나 그 찬사에 그렇게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우리 스스로 자신의 역량을 알기 때문이다. 800조원에 달한 가계부채, 600조원에 달한다는 공적 부채, 깊어만 가는 양극화가 우리의 앞길을 막고 있다. 거기다 천문학적 숫자일 것이라는 통일비용까지.
이렇게 돈 쓸 곳은 넘쳐나는데, 정작 돈을 벌 곳은 마땅치 않다. 내수시장은 점점 약화되고, 국내총생산(GDP)의 40% 이상을 만들어내는 수출시장 또한 장기 침체와 환율전쟁의 위협 속에 있다. 실로 얇은 얼음 위를 걷는 여리박빙(如履薄氷)의 상황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구지진(agequake), 즉 고령화 현상이다. 고령화는 경제의 구조적 노후화를 의미한다. 우리의 고령화 속도가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 빠르다는 것은 그만큼 성장의 이익보다 분배의 비용이 빨리 커지고, 경제동력이 빨리 사라지고, 세대 간 마찰과 갈등이 빨리 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업에 수명주기가 있듯이 한 나라의 경제에도 수명주기(life cycle)가 있다. 발아기를 거쳐 성장기, 성숙기, 쇠퇴기를 거치는 것이다. 우리 경제의 지난 60년은 발아기와 성장기였다. 이 시기의 특징은 도전적이고 유연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바로 그랬다. 모두에 나름대로 도전정신이 있었고 그것이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유연성 또한 우리가 보여준 하나의 차별 역량이었다. 오일쇼크, 외환위기, 금융위기 등 고비고비 부딪혀야 했던 숱한 도전들을 항상 새로운 도약의 기회로 삼은 역동적 유연성이야말로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자산이다. 후발주자인 한국 기업이 선발주자인 일본 기업을 넘볼 수 있게 된 것도 일본인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이 카멜레온 같은 변신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고령화는 바로 이런 우리의 역량이 급속히 사라짐을 의미한다. 그러나 연령적 고령화보다 경제에 더 치명적인 것은 정신적 조로(早老)화다. 도전정신이 사라지고, 가진 것을 지키려고만 하는 것이 작금의 우리 모습은 아닌가? 특히 도전정신이 넘쳐흘러야 할 젊은 세대들이 꿈을 잃고 있다. 아무리 개천에서 용 나기 어렵고 관심이 파편화되는 개성시대라 하지만, 젊은이들에게는 꿈이 있어야 한다. 꿈을 잃으면 자신의 미래, 나라의 미래도 없는 것이다. 그들을 그렇게 몰아간 것은 바로 우리 기성세대들이다. 도전의 위험보다 안전한 편승의 길을 권유한 것은 부모요, 암기식 교육으로 신밧드의 모험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빼앗아 간 것은 학교요, 출산을 기피하도록 불안한 미래를 보여준 것은 사회다. 이제 그들이 다시 꿈을 갖도록 만들어야 한다. 교육개혁도 그들이 꿈을 갖게 하는 데 맞춰져야 한다. 꿈을 도전하고 시험하는 프로그램들이 강화되어야 한다. 역사와 문화에 대한 긍지도 높여 국가와 사회에 대한 꿈을 다시 꾸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는 늙어도 그 에너지는 젊을 수 있다.
유연성의 저하 또한 우리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요소다. 모든 생존의 근본은 변화에의 유연한 적응에 있다. 더구나 21세기는 와해적 변화와 혁신의 시대다. 나심 탈레브의 말을 빌리면 예상치 못한 ‘검은 백조’가 나타나는 시대다. 스마트폰이 그러했듯이 그런 변화는 게임 규칙을 바꾸고 새로운 도전과 적응을 요구한다. 많은 국가가 그 적응을 못해 2류 국가로 추락하고 있다. 세계가 지금 변화에 몰입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어느 나라든 변화와 개혁을 이루려면 거버넌스(governance)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거버넌스 능력은 취약하다. 세계은행 조사에 따르면 특히 정치 부문이 취약하다. 보수와 진보의 대립, 불신, 미움이 정치를 실종시키고 있다. 수많은 법안이 국회에 잠들어 있고 상대를 향한 설득이 아니라 자기 편을 향한 외침만이 들린다. 미래 세대의 몫을 갖다 쓰는 포퓰리즘적 정책이 인기를 얻고 있다. 경제란 거버넌스 능력이 없으면 어느 날 갑자기 추락하는 것이다. 정치에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란 없다. 옳은 시기에 옳은 결정을 위해 보수와 진보의 주장이 지나치지 않아야 한다. 상대에 대한 비판에도 합리성과 품격이 있어야 한다. ‘유연한 보수, 유연한 진보’가 필요하다. 정치권이 이를 못하면 지식인들이라도 그 중심을 잡아야 한다. 지식인 사회의 보수와 진보 간의 소통이 강화되어야 한다. 보수와 진보진영 각각에 자신들의 극단주의를 비판할 역량이 만들어져야 한다.
건설은 힘들어도 파괴는 쉬운 법이다. 외부의 찬사가 있을수록 오히려 자신에게 ‘성공의 병’이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스티브 잡스는 스탠퍼드대 졸업식에서 ‘안주하지 말라’(stay hungry)고 하였다. 난제가 산적한 우리에게도 그 말이 필요하기는 마찬가지다.